독립 소프트웨어 스튜디오

그때까지
남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2054년, 제가 환갑이 되는 해입니다.
그 해에도 누군가 이 주소를 눌러 사이트가 열리고,
앱 하나가 예전처럼 실행되기를 바라며 만듭니다.

등대는 배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저 같은 자리에서 켜져 있습니다.

01사라진 것들

오래 쓰던 것이
사라진 적 있을 겁니다.

어느 날 종료 공지가 뜨고, 로그인이 막히고, 남는 건 즐겨찾기뿐인 일.
저도 그런 걸 몇 개 잃었습니다.
사진 몇 장은 건졌지만, 거기 적어둔 글은 못 건졌습니다.

그때 아쉬웠던 건 기능이 아니라,
그 안에 쌓인 시간이었습니다.

02정한 기준

제가 가장 오래 쓰고 있는 건
소프트웨어가 아닙니다.

십사 년째 같은 키보드를 씁니다.
스틸시리즈 6Gv2, 요즘은 팔지 않는 모델입니다.
십 년 넘게 손에 든 라이터도 하나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쓰던 소프트웨어는 여러 번 바뀌었고, 몇 개는 아예 사라졌습니다.

오래 남는 쪽은 늘 물건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한 번 쓰고 사라지는 대신 계속 찾게 되는 제품
  • 기능보다 쓰임이 먼저 이해되는 소프트웨어
  • 작은 불편을 분명하게 해결하는 도구
  • 사용자의 일상에 조용히 자리 잡는 경험
  • 시간이 지나도 다시 사용할 이유가 남는 제품

04만드는 순서

만드는 일은
출시로 끝나지 않습니다.

과정은 다섯으로 나눠 두었습니다.
넷은 출시까지의 일이고, 마지막 하나는 출시한 다음부터의 일입니다.
그 하나가 가장 깁니다.

  1. 01

    무엇이 불편한지 살핍니다

    제품은 기술이나 유행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반복적으로 흐름을 끊는 일, 기존 도구가 당연하게 남겨둔 불편에서 출발합니다.

  2. 02

    필요한 이유를 분명히 합니다

    모든 아이디어가 제품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어떤 상황에서 쓰고, 기존 방식보다 무엇이 나아지는지 말할 수 있을 때 시작합니다.

  3. 03

    필요한 만큼 만듭니다

    기능의 수로 가치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핵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에 집중하고, 목적을 흐리는 요소는 덜어냅니다.

  4. 04

    실제 사용에 맞게 다듬습니다

    기능이 작동하는 것과 제품이 완성되는 것은 다릅니다.
    속도, 안정성, 예외 상황, 문장처럼 매일 체감하는 부분을 반복해서 손봅니다.

  5. 05

    오래 쓸 수 있는 상태로 남깁니다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보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 사용할 이유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05유리를 닦는 일

밝기를 올리는 대신
유리를 닦습니다.

전환이 끊기는 순간,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예외 상황, 누구도 칭찬하지 않는 문장.
처음 볼 때는 보이지 않지만 오래 쓰면 반드시 드러나는 것들입니다. 저는 여기에 시간을 가장 많이 씁니다.

06곁에 있는 방식

좋은 도구는
꺼봐야 압니다.

창이 엉킨 채로 오래 작업하던 날, 화면을 정리하는
일이 작업의 일부가 되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Monkey Flash는 거기서 나왔습니다.
처음 켰을 때 감탄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며칠 쓰다 꺼보면 그제야 불편해집니다.

존재를 알리는 대신,
없을 때 아쉬운 쪽으로.

07한 사람의 스튜디오

작은 스튜디오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만듭니다.
규모를 크게 보이게 포장하는 대신, 그 사실을 작업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08하지 않는 말

자신감은 큰 목소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제로 작동하는 제품을 끝까지 완성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 세상을 바꾸겠다는 과장
  • 근거 없는 혁신과 최고의 경험
  • 규모를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하는 언어
  • 기술 자체를 목적으로 내세우는 설명
  • 사용자의 감탄을 먼저 요구하는 문장

보여주기 위한 복잡함보다 이해하기 쉬운 구조를, 순간적인 인상보다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완성도를 선택합니다.

그때까지
남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억